미국 건국 250주년(Semiquincentennial, 2026년 7월 4일)을 앞두고,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 사회에 따뜻한 치유와 통합의 메시지를 던지는 한인 피아니스트의 대규모 예술 프로젝트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주인공은 뉴저지 럿거스(Rutgers) 메이슨 그로스 예술대학의 피아노 교수이자 콘서트 피아니스트인 권민경(Min Kwon) 회장이다.
그녀가 기획하고 온몸으로 연주해 낸 역사적 프로젝트, ‘아메리카/뷰티풀(America/Beautiful)’의 탄생 비화와 최근 뉴욕에서 열린 화제의 공연 소식까지 심층 보도한다.
팬데믹과 분열의 상흔 속에서 피어난 질문: "우리는 어떤 나라가 되는가?"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가장 어두웠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바이러스로 인한 전례 없는 고립 속에 놓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20년 여름, 조지 플로이드와 브레오나 테일러 사망 사건은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극심한 정치적 분열로 번졌다.
이민자이자 두 딸의 어머니인 권 교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딸의 생일은 각각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과 '독립기념일(7월 4일)'이다.
권 교수는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리는 지금 깊이 분열되어 있다. 훗날 내 아이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예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녀는 파괴와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는 '창조적 희망'을 노래하기로 결심했다.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미국의 역동적인 창조성을 음악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다짐이었다.
왜 ‘성조기’가 아닌 ‘아메리카 더 뷰티풀’인가?
권 교수는 미국의 정식 국가인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 대신, 미국의 제2의 애국가라 불리는 가곡 '아메리카 더 뷰티풀(America the Beautiful)'을 프로젝트의 핵심 테마로 선택했다.
성조기가 다소 엄숙하고 호전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면, 캐서린 리 베이츠의 시와 새뮤얼 워드의 선율이 결합한 '아메리카 더 뷰티풀'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졸업식, 혹은 대통령 취임식을 통해 따뜻한 기억을 공유하는 노래다. 보편적 추억과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음악적으로도 선율이 매우 심플하여, 작곡가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해석하고 상상력을 펼치기에 가장 완벽한 캔버스가 되어주었다. 단순함이 주는 자유였다.
"여럿이 모여 하나로(E pluribus unum)"… 76인 거장들과의 유례없는 협업
권 교수는 이메일, 왓츠앱, 화상회의(Zoom) 등을 통해 미국의 살아있는 현대 음악 거장들에게 '아메리카 더 뷰티풀'을 주제로 한 솔로 피아노 변주곡을 의뢰했다. 이 무모해 보였던 제안에 무려 76명의 작곡가가 응답했다.
참여 작곡가들의 면면은 화려함 그 자체다.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거장 테리 라일리(Terry Riley), 현대음악의 대표 주자 니코 뮬리(Nico Muhly),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비제이 아이어(Vijay Iyer)를 비롯해 다수의 풀리처상, 그래미상, 맥아더 '천재' 장학금 수상자들이 대거 합류했다.
참여한 76명의 작곡가들은 각기 다른 세대, 인종, 성적 지향을 대변하며, 그들의 뿌리는 전 세계 33개국에 닿아 있다. 프로젝트가 33개국 문화적 배경의 용광로가 된 셈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들의 작품을 조명하며 "어떤 작품은 부드러운 기도이고, 어떤 작품은 가슴을 치는 저항이며, 또 어떤 작품은 내밀한 고백"이라고 극찬했다. 다양한 메시지가 작품에 공존한다.
실험음악의 선구자 파멜라 Z(Pamela Z)는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변주한 독창적인 곡을 선보였고, 아방가르드 팝 아티스트 레일라 아두-길모어(Leila Adu-Gilmore)의 작품은 피아노 건반을 팔뚝으로 내리치는 격렬한 퍼포먼스로 치열한 갈등의 시대를 연주했다.
지하 공동묘지 납골당에서 울려 퍼진 치유의 선율
권민경 교수는 이 76개의 변주곡을 모두 직접 연습하고 완벽히 연주해 내며, 음악 레이블 델로스(Delos Productions)를 통해 5장짜리 대형 음반 세트를 공식 발매했다.
최근 권 교수는 뉴욕 브루클린의 역사적인 '그린-우드 묘지(Green-Wood Cemetery) 지하 납골당'에서 클래식 공연 기획사 'Death of Classical'과 함께 특별 독주회를 열었다.
어둡고 침묵만이 가득한 납골당 지하, 30여 가문의 석조 묘비들 사이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울려 퍼진 웅장한 선율은 죽음과 절망을 이겨내는 예술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깊은 전율을 선사했다.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 "아름다운 결과물은 반드시 남는다"
럿거스 대학의 두 번째 'Laureate(계관 예술가)'로 선정된 권 교수는 이 프로젝트를 무용, 역사, 영화 등 학내 다른 예술 부서와의 융합 공연 및 전시로 계속해서 확장해 가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두 딸과 미래 세대에게 이 프로젝트를 통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밝혔다.
"훗날 다음 세대가 오늘날 우리가 겪은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돌아볼 때, '참 힘든 일도 많았고 아픈 역사가 있었지만, 결국 예술을 통해 이런 아름다운 결과물이 탄생했구나'라고 위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정치적 이념과 혐오가 대립하는 이 거친 세상에서, 76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멜로디 안에서 조화롭게 숨 쉬는 '아메리카/뷰티풀'은 예술이 가진 위대한 연대와 치유의 힘을 증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정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