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배우 하영 가족의 친일 논란으로 구한말 관비 유학생 출신 의료인들의 행적이 대중의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일제에 협력하며 '내선융화'에 앞장섰던 인물들과 달리 조국의 근대 의학 발전과 민족 자강을 위해 헌신했던 '민족 의사' 김익남(1870~1937)의 생애가 다시금 깊이 조명받고 있다.
구한말 관비 유학생, 엇갈린 안상호와 김익남의 궤적
최근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인 안상호(1872~1927)가 과거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뒤, 1916년 친일 단체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고 매일신보 인터뷰 등을 통해 '일선동체'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다고 발언한 사실이 재조명되었다. 이에 후손인 하영은 SNS를 통해 공식 사과했다.
안상호보다 3년 선배인 김익남은 똑같이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전공했으나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1899년 졸업 후 대한제국 정부의 귀국 요청에 응해 최초의 관립 근대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의 교관(교수)으로 부임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선 저항, 하지만 잊혀졌던 존재
김익남은 의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며 총 32명의 한국인 근대 의사를 배출해 국권 피탈기 한국 근대의학사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육군 군의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최초의 의사단체인 '의사연구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특히 김익남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하다 자결한 정재홍 의사의 추모 사업에 참여하는 등 일제의 의도에 저항했다.
이로 인해 일제로부터 배척받아 조선총독부가 발급하는 공식 '의술개업인허장'을 끝내 받지 못하는 등 극심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설립했던 의학교가 국권 상실로 8년 만에 폐지되면서 김익남의 업적 또한 제도적 기반을 잃고 오랫동안 대중에게 잊혀졌다고 설명했다.
하영과 안상호 논란 속 재조명
김익남의 삶은 2000년대 이후 사료 발굴을 통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지난 2015년 서울 종로구에 '의학교 터 표석'이 세워졌고, 2018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연건캠퍼스에 김익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특히 최근 대중문화계를 흔든 친일 논란이 역설적으로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잊혀 가던 참된 의료인 김익남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