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인 소설 《파친코(Pachinko)》의 저자 이민진 작가(90년 장학생 졸)가 예일대학교 올드 캠퍼스(Old Campus)에서 열린 2026학년도 예일대 학부 졸업생을 위한 졸업 전야 행사 '클래스 데이(Class Day)' 연설자로 단상에 올랐다.
17일 화씨 80도(섭씨 약 26.6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 속에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이 작가는 약 58분간 이어진 연설을 통해 자신이 예일대 재학 시절 겪었던 실패와 환멸, 그리고 인종차별적 경험을 가감 없이 털어놓으며 졸업생들에게 "급한 것(Urgent)보다 중요한 것(Important)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했다.
"나는 실패한 예일생이었다" 이민진이 고백한 환멸의 기록
이민진 작가는 자신이 36년 전(1990년) 예일대 역사학과를 졸업할 당시, 대학 생활에 깊은 환멸을 느꼈으며 기회를 "낭비했다"고 생각했음을 고백했다.
7세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그녀는 학부 시절 '한국학 태스크포스(Korean Studies Task Force)'를 이끌며 대학 당국에 한국어 수업 및 한국사 강좌 개설을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교수들로부터 "아시아계 학생들은 과학 분야만 공부하고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편견을 마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기성 학계의 냉대와 차별을 당한 것이다.
이 작가는 재학 중 어떤 주요 단체나 클럽에도 선택받지 못했고, 핵심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과 발언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성적 관리와 교수들의 추천서(지원) 부족으로 인해 대학원이나 박사 과정 진학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로 인해 오랜 기간 무력감에 시달렸음을 털어놓았다.
효율성의 거부: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
로펌을 그만두고 소설가의 길을 택한 후 첫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내기까지 12년, 두 번째 소설 《파친코》를 출간하기까지 다시 10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그녀는 시간의 가치를 통계적·양적 효율성으로만 재단하는 현대 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작가는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의 두 가지 시간 개념을 제시했다.
단순히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에 쫓기지 말고, 무엇이 중요하고 언제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질적이고 결정적인 기회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포착하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졸업생들에게 "시간은 여러분의 적이 아니라 친구"라고 단언하며, "이곳 예일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밝은 순간과 가장 어두운 순간이 여러분에게 '진실과 더 잘 싸우는 법(How to better fight for truth)'을 가르쳐 주었다면, 그 시간은 단 1초도 낭비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어떤 시간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파친코》의 핵심 영감을 예일대 재학 시절 트럼불 칼리지(Trumbull College)의 티 모임(Tea)에서 얻었다고 덧붙였다.
'불안한 세대(Anxious Generation)'를 향한 헌사와 현장의 격돌
이민진 작가는 2026년 졸업생들이 대학 재학 기간 마주해야 했던 글로벌 복잡계의 위기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들을 '불안한 세대(Anxious Generation)'로 명명했다.
그녀는 학생들이 견뎌낸 글로벌 팬데믹, 전쟁, 학교 총기 난사, 기후 변화(산불), 인플레이션, 인공지능(AI) 쇼크, 경제적 불평등, 주택난,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권위주의의 부상을 직접 언급했다.
이 작가는 이러한 청년 세대의 다중 위기에 대해 "여러분은 알람이 켜진 채 살아가도록 강요받았으며, 이에 적응해 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며 격려했다.
특히 연설 후반부 이 작가가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의 강경 조치, 낙태권 상실(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파장), 과학 연구 예산 삭감 등 미국 내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을 직설적으로 끄집어내자, 올드 캠퍼스를 가득 채운 졸업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거센 박수와 정치적 야유(Booing)가 동시에 터져 나오며 현장 지형의 팽팽한 긴장감을 대변하기도 했다.
김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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