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헌법을 개정해 두 국가를 명문화하고, '통일·민족·선대' 흔적도 지웠다.
북한이 2026년 3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단행한 헌법 개정은 남북 관계를 '민족'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관점으로 완전히 재정립하고, 김정은 위원장의 독점적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78년 만의 '영토 조항' 신설: "남쪽으로는 대한민국과 접경"
1948년 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헌법에 영토의 정의를 명문화했다.
헌법 제2조에 북측 영역이 북으로는 중국·러시아, 남으로는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한국을 통일의 대상이 아닌 별개의 국가로 규정한 것이다.
"영역에 대한 그 어떤 침해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불가침성을 강조하는 문구를 넣어 주권 국가로서의 영토 수호 의지를 강력히 투영했다.
다만, NLL(북방한계선) 등 예민한 국경선의 구체적 경계는 담지 않아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한 수위 조절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통일·민족·선대' 흔적 지우기: "적대적" 표현은 일단 보류
개정 헌법은 김정은 위원장이 지시한 '적대적 두 국가론'을 반영하면서도 용어 선택에는 신중을 기한 모습이다.
'자주·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 기존의 통일 원칙과 민족 개념이 헌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언급했던 '제1적대국', '교전국'과 같은 과격한 표현은 헌법 전문에 담기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를 향후 '평화 공존'으로 나아갈 최소한의 외교적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정은 '유일 지배' 완성: 최고인민회의보다 앞선 국무위원장
이번 개헌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은 명실상부한 국가수반이자 절대 권력자로 등극했다.
국가기관 배열 순서에서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보다 앞서 배치되어 서열 역전이 이루어졌다. 이는 입법기관보다 개인 독재 권력이 상위에 있음을 법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의장과 내각 총리에 대한 실질적인 임명권이 명시, 임명권을 강화했다.
'핵무력 지휘권' 최초 명시: 유고 시 위임 근거 마련
가장 위협적인 변화는 핵무기에 대한 법적 지휘 체계를 확립한 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에 대한 지휘권은 국무위원장에게 있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국무위원장이 해외 방문 등 유고 상황일 때 핵무력 지휘기구에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핵 사용 절차를 제도화하여 대외적 억제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번 개헌은 선대(김일성·김정일)의 업적이나 '통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김정은 위원장이 핵을 손에 쥐고 직접 통치하는 '주권 국가'임을 전 세계에 선포한 것으로 풀이된다.
헌법 명칭조차 '사회주의 헌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으로 바꾸며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선을 넘는 걸 넘어, 선을 없애버린 헌법 개정
이번 개헌은 법적인 형식을 갖춘 '절대 독재의 공식 선언'이자 '1인 지배 체제의 완성'으로 볼 수 있다.
단순히 권력이 강해진 수준을 넘어, 북한이라는 국가 시스템 자체가 김정은이라는 개인을 정점으로 완벽하게 재편되었다.
역사적으로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한 뒤 헌법을 개정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 사례는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의 북한처럼 '개인의 핵무력 지휘권'과 '대의기관(의회) 위의 개인'을 헌법에 직접적으로 명시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특히, 보통은 '공화국'이나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유지하려 노력하는데, 북한은 이를 아예 제도적 절대왕정 수준으로 노골화했다.
대부분의 독재 국가들은 아무리 독재를 하더라도 헌법 서문이나 조항에 "권력은 인민(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공화국적 수사를 남겨두는데, 인민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보다 개인(국무위원장)을 법적 서열 1위로 올린 것은 "인민이 주인"이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가설조차 포기한 것이다.
'국가'가 아닌 '개인'이 핵무력 지휘권을 갖는다고 명시한 것은 전 세계 헌법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무력의 사유화 선언이다.
결국 다른 나라의 독재 개헌이 '꼼수'를 통해 임기를 늘리거나 권한을 가져오는 방식이었다면, 북한은 아예 "이 나라는 김정은의 것이며, 법은 그것을 확인하는 도구일 뿐이다"라고 전제군주제를 현대적 법률 용어로 번역해 놓았다.
박성민 기자
©2026 KOREA PORTAL.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