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전역에서 치솟는 주거 비용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마드리드 도심에는 수천 명의 청년들이 모여 정부의 즉각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AP, 로이터 등에 따르면, 24일 스페인의 마드리드 도심 및 주요 도시에서 마드리드 세입자 연합 및 노동조합(UGT, CCOO), 청년들 등 수천 명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주거비 문제에 대해 대책을 내놓으라고 시위를 벌였다.
관광객 증가와 단기 임대 확산으로 인한 주택난 심화로 주거비가 급등하자 "주택은 투기 수단이 아닌 권리"라며 대규모 거리 행진 및 정책 촉구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번 시위에는 '월급의 99%가 주거비'라는 피켓이 등장했는데, 이 수치는 스페인 청년 세대가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월급의 98~99%가 월세
스페인청년위원회(CJE)의 연구에 따르면, 청년 월급의 98~99%가 월세라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이는 스페인 청년 노동자의 세후 평균 월급 1190유로(약 209만원)과 도심 평균 월 임대료(1176유로, 206만6000원)를 비교한 상징적 지표다.
청년이 독립을 위해 부담해야 할 월세가 평균 월급과 거의 일치하는 끔찍한 현실에 대한 방증으로, 결국 식비나 교통비 등 기본적인 생계유지가 사실상 불가능한 '빈곤의 굴레'를 의미한다.
집세를 내고 나면 한 푼도 남는 게 없고, 먹고 살 돈은 없어지는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청년들이 독립을 시도하는 순간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집을 구하지 못한 청년들은 30세가 넘어서도 부모 집에 얹혀살아야 하며, 이는 결혼 및 출산율 저하로 이어져 스페인의 미래 성장 동력을 갉아먹고 있다.
스페인청년위원회가 지난 22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독립해 거주하는 16~29세의 비율은 14.8%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고, 청년층의 평균 독립 연령도 30세를 넘어섰다.
경제 성장이냐, 주거권이냐
스페인 주거난을 보도하는 언론들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경제 중심 매체에서는 주택 공급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관광업 규제보다는 민간 건설 활성화 등 시장 공급을 늘려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스페인 경제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래서 이들은 "관광객을 규제하면 경제가 죽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집이 부족한 이유가 '투기'나 '단기 임대(에어비앤비)' 때문이라는 점보다는, 단순히 '공급 부족'이라는 물리적 이유에만 초점을 맞춘다. 즉, "부자들의 투기 문제"보다는 "건물주들의 공급 유인책"에 더 큰 관심을 둔다.
하지만, 스페인 중앙은행은 2025년까지 스페인에 약 70만 호의 주택이 부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페인에서 지난 몇 년간 120만 가구가 새로 형성되었지만, 완공된 신규 주택은 47만 4천 채에 불과하다. 즉, 수요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공급 절벽 상태다.
전문가들은 이 부족분을 해결하려면 향후 5년간 매년 약 33만 호를 지어야 하는데, 이는 현재 건설 속도의 4배를 요구하는 수치다. 사실상 단기간에 해결이 불가능한 구조적 과부하 상태에 빠진 것이다.
부족분 70만 호 중 절반(49%)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알리칸테, 무르시아 등 5개 주에 집중되어 있다.
일자리가 많은 대도시와 관광지에 주택 수요가 몰리는데, 정작 이 지역에는 관광객용 단기 숙박업(에어비앤비 등)이 일반 주택을 잠식하고 있어 실거주자들이 살 곳이 없다.
이런 주택 부족은 결국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현재 유럽 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스페인의 주택 비용은 연간 13% 상승했다.
렌트비가 치솟고 살 집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시민 권리 중심 매체에서는 시민의 거주권과 규제를 강조하고 있다. 투기성 단기 임대(에어비앤비 등)가 집값을 왜곡한다고 보고, 관광객 숙소 규제 강화와 정부의 공공 주택 공급 확대를 통해 세입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시위에도 "우리는 관광객 말고 이웃을 원한다"는 피켓이 등장했는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 대도시 주민들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단기 숙박 임대가 급증한 것이 일반 주거용 주택을 구하기 어려워진 이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 지어진 집들은 대부분 관광객용 숙소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지난 해 관광객 수가 9700만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정부의 대응 계획
스페인 정부는 이번 시위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지난달 70억 유로(약 12조3000억 원) 규모의 공공 주택 공급 계획을 승인한 바 있다.
정부는 4년간 주택 공급을 늘리고 청년 세입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러한 정부 대책이 "달팽이 걸음처럼 느리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주거용 임대차 계약 자동 연장과 임대료 상한을 2%로 제한하는 법안은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현장의 세입자들은 "정부의 대책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퇴거 위기에 처해 있다"며 더욱 강력한 법적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와 시위대 간의 갈등은 내년 총선 전까지 핵심 정치 쟁점이 될 전망이다. 정부가 실효성 있는 단기 대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민심 이반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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