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 사이트 'US 뉴스 센터' 운영하며 미 내 중국계 커뮤니티 여론 조작 시도
공범은 이미 4년형 복역 중… "지방 정부까지 침투한 중국의 영향력 공작"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북동부의 평온한 도시 아카디아(Arcadia)가 거대한 국제 스파이 스캔들의 중심지로 변했다.
미국 법무부(DOJ)는 에일린 왕(Eileen Wang, 58) 아카디아 시장이 중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미국 내에서 불법 공작 활동을 벌인 혐의를 인정하고 시장직에서 전격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언론사를 통해 중국 정부에 유리한 기사를 보도하는 등 중국 관리들의 지시를 수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연방 당국은 왕 시장이 중범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기로 합의했으며, 이 혐의는 연방 교도소에서 최대 10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왕 시장의 변호인단은 그녀가 혐의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과거 개인적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고 전했다.
왕 씨는 지난 2022년 11월 5인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아카디아시는 시의원들이 돌아가며 시장직을 맡는 구조다.
LA 인근의 부촌이자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는 아카디아 시의 시장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에 한인들과 시민들은 물론 미국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시장'의 탈을 쓴 '중국 간첩'
LA 타임즈(LA Times), 뉴욕 타임즈(NYT), 폭스뉴스, CNN의 보도와 미 검찰의 기소장에 따르면, 왕 시장의 범죄 수법은 매우 치밀했다.
그녀는 공범인 야오닝 쑨(Yaoning Sun, 65)과 함께 중국인 커뮤니티를 겨냥해 'US 뉴스 센터(US News Center)'라는 온라인 매체를 설립했다.
이 사이트는 겉으로는 지역 뉴스 매체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직접적인 게시물 지시를 받는 선전 도구였다. 친중 콘텐츠를 통해 중국 정부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반대 세력을 비방하는 콘텐츠를 지역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유포하는 일을 했다.
한 예로 2021년 6월, 중국의 한 정부 관리는 로스앤젤레스 주재 중국 총영사가 작성한 <LA 타임즈> 기고문 링크를 왕 시장에게 보냈다.
해당 글은 중국 신장 지역의 위구르인 박해, 강제 노동, 학대 보고를 반박하며 "신장에는 제노사이드(집단 학살)나 면화밭 강제 노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왕 시장은 링크를 받은 지 불과 몇 분 만에 자신의 뉴스 사이트에 이를 공유했다.
미국과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위구르 정책을 집단 학살 및 반인도적 범죄로 선포한 바 있다.
이런 식으로 왕 시장과 쑨은 2020년 말부터 2022년까지 중국 정부 관리들을 대신해 미국 내에서 친중 선전물을 유포하며 그들의 이익을 도모했다.
중국 측에서는 유령 회사나 대리인을 통해 '광고비'나 '투자금' 명목으로 이 언론사를 지원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온라인 알고리즘이 범죄에 이용되다
이번 사건에서 눈에 띄는 점은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뉴스 알고리즘을 교묘히 이용했다는 점이다.
왕 시장 일당은 미국 내 민주주의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온라인상에서 친중 콘텐츠를 대량으로 생산·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했다.
공범은 약혼자
그녀의 파트너였던 쑨은 이미 지난해 외국 정부 대리인 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쑨은 지난 2022년 왕 시장의 선거 운동 당시 캠페인 회계 담당자(Treasurer) 역할도 맡았다.
쑨은 중간에서 중국 당국의 자금과 지시를 왕 시장과 언론사에 전달하는 '핸들러(관리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단에 따르면, 당시 왕 시장은 쑨과 약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 관계가 2024년 봄에 끝났다고 밝히며, 변호인단을 통해 "그녀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을 믿고 사랑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전했다.
또한 왕 시장은 중국 정부의 대리인(간첩) 혐의로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20개월을 선고받은 또 다른 인물인 존 첸(John Chen)과도 소통한 것으로 드러났다.
쑨에 대한 처벌 후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왕 시장 역시 결국 유죄를 인정했다.
지방 정부가 뚫렸다
언론과 정치권은 이번 사건을 "중국 영향력 공작의 진화"로 평가하고 있다.
연방 정부나 고위직이 아닌, 지역 주민들과 밀착된 '시장' 급 인사, 지방 정치인을 포섭해 아래에서부터 여론을 잠식하려 했다는 점이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 정보기관(MSS)은 연방 의원보다 감시가 느슨한 지방 정부의 시의원이나 시장을 포직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지역의 중국계 커뮤니티 발전을 돕고 싶다"며 접근하여 선거 자금을 후원하거나, 중국 현지 시찰(비즈니스 투어)을 화려하게 대접하며 친분을 쌓는다. '문화 교류'나 '비즈니스 협력'으로 시작해 서서히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식 포섭을 하는 방식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모국(중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곧 당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길"이라고 설득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법무부는 "외국 정부의 지시를 받으면서도 이를 숨기고 활동하는 행위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국가 안보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아카디아 시의회는 왕 시장의 사임 즉시 부시장을 시장 대행으로 임명하고 시민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우리가 뽑은 시장이 외국 요원이었다니 배신감을 느낀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간첩은 도청 장치를 설치하거나 기밀 서류를 빼돌렸지만, 현대의 간첩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해킹한다. 그리고 왕 시장이 운영한 뉴스 웹사이트는 일종의 '심리적 백도어'였다.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뉴스의 알고리즘이 누군가의 선전 도구로 쓰이지 않도록 필터링 기술을 더 고도화해야 한다는 숙제도 남기고 있다.
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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